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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상록문화제 홈페이지 방문을 환영합니다.

심훈중앙대청소년(고등부)문학상
심훈 작가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1977년 제1회 행사를 시작으로
매년 9월말에서 10월초에 3~4일 동안 당진시 일원에서 상록문화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SIMHOON SANGNOK CULTURE FESTIVAL


<소설부문 장원 수상작>

 

delete

                         김수빈(경북외국어고등학교 3학년)

 

 

 

‘당신의 흔적을 지워드립니다.’ 누군가의 흔적을 완벽히 삭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서재 마룻바닥에는 으스스한 찬 기운만이 밟힌다. 얼룩덜룩한 모니터 빛이 엄마의 가칫한 얼굴 위로 물든다. 마우스 클릭 음이 몇 번 울리고, 새로운 창이 화면에 띄워진다. ‘원칙 제 1조, 관리자 권한으로 고객의 삭제 요청 내역을 보는 행위는 절대 금지한다.’ 엄마는 고개를 아래쪽으로 힘없이 가꾸러뜨린다. 나는 역사 연구 자료들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는 책장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생각 해 봐. 유진이 너도 초등학생 때 인터넷에 올렸던 창피한 글들을 지워버리고 싶었던 적 있잖아. 엄마는 바로 그런 흔적들을 지워주는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엄마는 당당한 목소리로 자신의 직업인, ‘디지털 장의사’를 설명하며 말했다. 이 세상에 존재할 만한 가치가 없는 기록은 없어. 나 같은 사람한테는 아주 사소한 기록들이라도 얼마나 중요한 자료가 되는데. 아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류가방을 뒤적이며 말했다. 사학자였던 아빠의 가방 속엔 수 십장의 논문 자료가 들어 있었다.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여 망설임 없이 삭제키를 누르던 엄마는 이제 없다. ‘박성호 고객님의 삭제 요청’이라는 제목의 글 주위에서 마우스 커서가 뱅글뱅글 움직인다. 적어도 수십 번 사망자들의 흔적을 지웠을 엄마도, 죽은 남편의 흔적은 지우기 힘든 것일까. 나는 책장에 꽂혀 있는 파일 하나를 꺼낸다. 파일 속의 종이들은 쪽 번호를 무시한 채 마구잡이로 섞여 있다.

아빠가 엄마에게 자신의 기록을 지워달라고 처음으로 요청했던 날은, 아마 논문 표절논란에 휩싸인 후였을 거다. 나는 언젠가 안방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아빠의 건조한 목소리를 들었다. 당신… 내 기사들 봤지? 그것들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어. 그건 안돼요. 거짓 사실 유포가 아닌 이상… 타인이 작성한 글은 지우기가 힘들어요. 엄마의 말이 끝나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당신마저 날 못 믿는 거야? 아빠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들리고, 갑자기 안방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아빠는 벌겋게 핏줄이 선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파일 속 종이들을 순서대로 정리한다. 엄마는 아랫입술을 꾹 깨문다. ‘달칵’하는 클릭음이 들린다. 그 소리가 마치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 같다. 화면 상단에는 ‘박성호’라는 이름이 적혀 있고 그 밑으로 ‘삭제 요청 내역’이 인터넷 주소 형식으로 셀 수 없이 나열되어 있다. 나는 엄마 옆에 있는 작은 나무의자에 앉는다. 미처 정리가 덜 된 종이들을 다시 파일에 넣고 컴퓨터가 놓인 책상 위에 올려둔다. 엄마는 눈을 한 번 꼭 감더니, 제일 첫 번째 인터넷 주소를 클릭한다. 새로 열린 창에는 ‘박성호, 논문 표절…’이라는 헤드라인의 기사가 담겨 있다. 엄마의 눈가가 조금씩 붉어진다. 떨리는 손으로 두 번째 인터넷 주소를 클릭하자, 이번엔 ‘박성호 표절 아님이 밝혀져…’라는 기사가 떠오른다. 키보드 위로 투명한 눈물이 투둑 떨어진다. 엄마는 말없이 키보드의 삭제키를 누른다. 모든 흔적들은 삭제되고, 정리되지 못한 파일만이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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